산내암자
일지암(一枝庵)
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 후기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 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 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이 나온다.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39세 때인 1824년(순조24)에 중건하여, 이곳에서 독처지관(獨處止觀)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다.
일지암은 초의 선사가 수도하기 위해서 지은 암자로, 초의 선사가 열반에 들자 폐허가 되었다. 이곳은 초의 선사가 지은 암자라 해서 '초암터'라 불리웠다. 수 십 년 전부터 차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호가 높아지면서 차의 중흥조 초의 선사의 유적지를 찾게 되면서 일지암이 중건되었다.
일지암터는 40여년 전에 응송스님과 낭월스님이 그 터를 확인하여 그곳에 건물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터가 있는 곳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 늘 질척거렸다고 한다. 물이 나오고 양지 바른 곳이라서 이곳에는 산돼지나 노루가 다니는 길목이었고, 그래서 숯꾼이나 초군들이 짐승 덫을 설치하던 곳이라고 한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선다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일지암은 한국 차의 성지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 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茶俎,돌부), 그리고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 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이 초정(草亭)은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그리고 일지암 본당은 윗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윗 연못에서 잉어가 한가로이 노니는 등 누마루에서 구름 낀 산경을 멀리 내려다보는 다회(茶會)와 선유(仙遊)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음미하게 할 만하다. 그래서 초의의 시(詩)·선(禪)·다(茶)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문화의 산실이 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초정과 연못 사이에 축조된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평평한 면이 끼여 있고 그 앞에는 이보다 넓은 판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 돌 평상을 차를 마시며 선을 하던 좌선석으로 보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대둔사의 13대 종사로 일찍이 이곳에 기거하며 다도를 중흥시킨다. 그는 「동다송」이라는 우리 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여 널리 펴는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을 크게 정리하고 닦음으로써 다도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대흥사(대둔사) 가까이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다인(茶人)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초의와 차를 통하여 더욱 두텁게 교유하였다. 다산은 이곳과 가까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대흥사(대둔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에 대둔사와의 관계를 맺게 되고 초의와도 남다른 친교를 가졌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초 대둔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다도는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게 된다. 이 때문에 대흥사(대둔사) 일지암은 우리 나라 다도의 요람으로 불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8월1일 초의의 열반일을 기해 추모행사인 초의제를 거행하고 있다.
[자료 :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
진불암
진불암은 표충사를 옆으로 계곡을 따라 약 1km 가량 올라가는 두륜산 중턱에 자리잡은 대흥사의 암자이다. 진불암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 백년 된 은행나무가 암자의 역사를 묵묵히 말해 주며 정교하게 쌓아올린 돌탑 하나가 찾는 이의 눈길을 끈다. 진불암은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지 못한다.
진불암과 고진불암
「대둔사지」에는 1630년(인조8)에 수월극현(水月克玄)대사와 덕호(德浩)가 함께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보다 훨씬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93년(숙종19)에 이홍록(李弘錄)이 덕탄(德坦)과 함께 중건했고, 1750년(영조26)에는 북미륵암을 중수한 바 있는 온곡대사(溫谷大師)와 함께 우일(宇一)장로가 진불암을 중수했다. 또한 채미대사(採薇 大師)의 글에는 영곡(靈谷) 영파(影波).만화(萬化).운담(雲潭).아암(兒庵) 등의 승려가 이 암자에 거쳐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진불암은 조선중기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현재 진불암은 응진당, 향적당,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응진당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안에는 불상으로 석가 부처님과 28나한상, 문관상이 있다.
그리고 1987년 봉안된 범종과, 1972년의 진불암 중수 불사 당시의 시주자 이름이 적힌 현판도 있다. 불화로는 삼세후불탱화를 비롯해서 칠성탱화.신중탱화.산신탱화가 있다. 이들 탱화는 낭월 고재석스님이 그렸다.
진불암에서 북암으로 넘어가는 삼거리에 토굴이 있는데, 진불암의 옛주인 청화스님의 수도처이다.
진불암은 대흥사의 암자중 신도들이 많은 탓인지, 크고 작은 옹기들이 장독대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한편 「대둔사지」에는 고진불암과 16나한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진불암은 현재의 진불암 근처에 있다. 옛날 기록에 말하기를 강진의 백도방(白道坊)에 서씨라는 어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기를 잡다가 서쪽 나라의 배를 만났다고 한다. 배 안에는 16대 아라한상이 실려 있어 '그것을 두륜산방(頭輪山房)에 봉안하고 편액을 진불(眞佛)이라 한다' 했다. 진불은 곧 응진(應眞)으로서 나한을 뜻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정사(精舍)를 산방(山房) 곁에 건립하여 이름을 진불이라 했으며, 또 달리 고진불(古眞佛)이라 했다. 1740년에 위일장로(位 一長老)가 중건했으며, 또 1791년에 정능선로(定能禪老)가 중건했으니 전후 다섯번을 중건했다'.
고진불암은 진불암 바로 위에 있는 암자로, 지붕은 슬레트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 암자는 스님들의 수도처로 사용되고 있다.
[자료 :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
청신암
청신암은 대흥사 산내 암자 가운데 큰절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암자로 대웅전과 청신암이 갈라지는 반야교의 오른편 계곡 옆에 자리잡고 있다. 청신암은 법당과 요사를 함께 겸하고 있는 건물 형태로 되어 있다. 지금의 법당은 1997년 새로 중수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두륜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한 눈에 보이는데, 이 산줄기를 남근(男根)으로 비유하여 이곳이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까닭을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이곳에는 아미타불상과 관음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 있고, 아미타 탱화 칠성탱화 신중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신중탱화로서 본래 1868년(고종5)에 도선암(道仙庵)에서 조성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 새의 날개 깃이 꽂힌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위태천(韋太天)이 서 있으며, 그 옆에는 칼을 든 무장들이 서 있다. 위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합장을 하고 있으며, 그 옆에 천부중(天部衆)이 시립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간략한 구성을 보이는 불화로서 기연(錡衍) 등의 금어가 그렸다.
또한 후불탱화인 아미타탱화는 화기에 의하면, 1870년 천여(天如) 등의 금어가 그려서 무량전(無量殿)에 봉안하였다. 그림의 구성은 연화대좌에 앉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정병을 든 관음보살과 석장을 짚은 지장보살이 대칭으로 시립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가섭과 아난이 합장하고 서 있다. 전체적으로 구성은 단순하지만 인물 주위의 바탕을 붉게 채색하고 금니(金泥)로 화염과 구름을 복잡하게 그려 놓고 있다. 그 밖에 칠성탱화는 1966년, 산신탱화는 1935년에 봉안되었다.
한편 이곳에는 전에 진불암에 봉안되었던 범종이 있다. 어느 때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명문(銘文)에 '강희사십팔년기축사월일진불암대종(康熙 四十八年己丑四月日眞佛庵大鐘)'이라 씌어 있어 1709년(숙종35)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범종 조성에 참여한 화주 수성(守晟)을 비롯 주공(鑄工), 각공(刻工)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크기는 높 70cm, 입지름 50cm로 정상부에는 용뉴와 용통을 두었으며, 상부에는 뾰쪽한 앙련(仰蓮)과 그 아래에는 평범한 연화문을 나타냈다. 그 아래에 유두와 4좌의 유곽, 그리고 보살상을 교차하여 배치하였다. 유곽 위에 마련한 원 안에는 범자(梵字)가 쓰여 있다.
남미륵암
남미륵암은 창건연대를 알 수 없고, 다만 전훤선사(典煊禪師)가 중수했다는 사실만 『대둔사지』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스님들의 수도처로 이용되는 조그마한 건물과 음각의 마애불상이 남아 있다.
『대둔사지』에는 '두륜봉 아래 남미륵암에 있는데, 미륵불은 전실이 없어 이끼가 끼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으로 보아 남미륵은 조성 당시부터 보호 전각이 없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이 남미륵은 전실이 없이 밖으로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서 미륵불을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남미륵암 불상의 조각 수법은 음각의 형태를 취했는데, 북미륵이 양각임에 비해 남미륵이 음각이란 점에서 아마도 이들 미륵불은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조성한 듯 하다.
현재 남미륵암에는 스님들이 수행했던 조그마한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고려시대 양식으로 보이는 납석여래좌상 1구가 발굴된 바 있다.
북미륵암
만일암의 북쪽과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북암, 남미륵암이라 불렀다.
이 두 암자는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둔사지』에는 '건륭갑술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북암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암은 1754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연담 유일(蓮潭有一) 벽담행인(碧潭幸仁) 아암혜장(兒庵惠藏) 같은 고승들이 바로 이곳에서 강학(講學)을 열었다.
북암은 용화전 요사 등의 건물과 2기의 3층 석탑으로 이루어졌다.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1985년 4월에 중수하였으며, 1995년 4월에 중수한 요사채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ㄴ'자형의 건물이다. 그밖에 신중탱화, 산신탱화와 1987년에 조성한 동종 및 위패가 있다.
만일암
만일암은 두륜산의 가련봉 아래에 있는 암자로 대둔사의 여러 암자 중에서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옛날 기록과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만일암 이 비록 암자에 속하지만, 대둔사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하여 다산은 『만일암지』에서 '유송(劉宋) 때 정관존자가 창건하고, 소량(簫梁) 때 선행대덕이 중건하였다'고 기록하면서, 이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강희 14년(1675)에 융신선사(融信禪師)가 중건하고, 현기화상(玄己和尙)이 강희 말년에 중수하였으며, 응명두타(應明頭陀)가 건륭년간(1736-1795년)에 중수하였다. 이후 가경 14년(1809)에 자암전평(慈菴)과 은봉두예(隱峰斗芸)가 또 다시 중건하였는데, 이것은 믿을만한 사실이다. 지금 암자는 무너져 없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만일암에서는 만화원오(萬化圓悟), 연해광열(燕海廣悅), 금하우한(錦河優閒), 금봉희영(禽峰僖永), 백화찬영(白花贊英), 지월정희(智月鼎熙), 응성민훈(應星旻訓) 등의 여러 고승들이 머물렀다.
암자터 주변에는 오층석탑, 연자맷돌, 석등, 샘터 등이 남아 있다.
『만일암지』에는" 7층석탑이 있으며, 그 탑은 아육왕이 세웠기 때문에 아육왕탑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오층의 석탑은 석등의 옥개석을 상륜부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7층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할 때 암자보다 탑을 먼저 세웠다고 한다. 탑을 완성한 후에 암자를 지으려니까,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해가 지지 못하게 탑에 묶어 놓고 암자 세우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암자를 완공 한 후에 암자명을 잡을 만(挽)자와 해 일(日)를 써서 만일암(挽日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석탑 앞에 있는 샘터는 배수가 잘되지 않아서 물맛은 좋지 않다. 이 샘은 원래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음 양수 샘을 만들었다고 한다. 암자터 아래쪽에 암 수의 괘목 나무가 서 있는데, 이것을 고려하여 음 양수 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괘목나무가 두 그루였는데, 한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식물 학자들은 이 나무의 수령을 천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나무를 천년수라 부른다. 어쩌면 이 나무의 나이테가 곧 만일암의 역사라 할 것이다.
[자료출처 :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
상원암(上院庵)
상원암은 진불암에서 약 500여m 남쪽에 자리잡은 암자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대중을 모아놓고 불경을 강론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암자로 부르지 않고 원(院)으로 불리웠던 것 같다. 『대둔사지』에도 이곳을 분명 암자로 분류해 놓고, 상원암으로 기록하지 않고 '상원(上院)'으로 기록한 사실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상원은 언제 창건되었는지 그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강희년간(康熙年間ː1662∼1722)에 화악대사(華岳大師)가 중건하였다'는 『대둔사지』의 기록으로 보아, 18세기 초에 중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악대사가 암자를 중건하기 이전에도 이곳은 누각을 갖출 정도로 규모가 큰 암자였던 것 같다.
'취여삼우가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종지를 강론하고 있었다. 상원루의 담장 밑에 있던 화악은 강의를 엿듣다가 깨달은 바 있어 팔러 다니던 농기구를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 주어버리고 마루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배움의 과정을 요청하였다.'
대흥사의 제2대 대종사인 취여의 강론을 엿듣고, 이에 깨달음을 얻은 화악대사가 불가에 입문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내용인데, 여기에 상원루(上院樓)라는 누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상원은 대둔사의 대종사와 대강사들이 거처하면서 법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에서는 취여, 월저, 화악, 설봉, 설암, 벽하, 호암, 상월, 연담 등의 대종사와 만화, 연해, 정암, 완호 등의 대강사들이 거처하면서 강론(講論)을 펼쳤다고 하니, 당시 상원의 규모와 사세를 짐작할 만하다.
상원에서는 도솔봉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인다. 그런데 도솔봉에서 작전도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이곳을 보면 마치 함박지 지형처럼 보인다.
[자료 :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
백화암(白華庵)
백화암은 유선여관 건너편에 세워진 암자이다. 이 암자는 본래 응송 박영희 스님의 집터였다. 현재 비구니 스님들이 거주하는 암자이다.
관음암(觀音庵)
관음암은 원래 명적암(明寂庵)이었다. 관음암은 남암 다음에 있는 암자이다.
중건할 때 세워놓은 삼층석탑 1기가 있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는 해 모양의 둥근 정원이 꾸며져 있다. 아마도 툭 터진 정면을 비보하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조성한 듯 하다. 이곳에서 정면, 즉 동쪽을 바라보면 두륜봉과 가련봉, 그리고 북암이 한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진다.